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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재(晩修齋)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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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만수재(晩修齋)
  • 글자체 예서(隸書)
  • 크기 25.0x64.0x2.2
  • 건물명 만수재(晩修齋)
  • 공간명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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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재(晩修齋)

만수재(晩修齋)


만수재(晩修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종택의 사랑채 편액이다. ‘만수’는 만년에 수신과 학문에 종사한다는 의미로, 소식(蘇軾)의 「빈가정소지貧家淨掃地」 시에 “못난 선비가 늘그막에 도를 듣고서, 애오라지 졸박함으로 스스로 닦노라. [下士晩聞道 聊以拙自修]”라고 한데서 취하였다. 이상정은 그의 저서 「만수록晩修錄」에서 “마음가짐에는 세 가지 절목의 공부가 있으니, 일이 생기지 않았을 때에는 기대하지 말아야 하고, 응대할 때에는 한쪽으로 치중하지 말아야 하고, 이미 지난 뒤에는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형체가 없어 출입이 일정하지 않고 잡으면 잡을수록 더욱 일정하지 않다. 반드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고 응접하는 가운데서 공부를 하여 조금이라도 방기됨이 없도록 하여야 이 마음이 이 안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안과 밖인 마음과 몸은 본래 두 개의 덩어리가 아니라서 밖을 다스려 안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이 일상에서 매우 긴요한 공부이다.”라고 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예서체(隸書體)이다.

한나라의 예서는 방경고졸(方勁古拙)하다고 한다. 정방형의 자형에 필획은 굳세고 서풍은 예스럽고 졸박하다. 이 편액의 글씨는 대체로 이런 한예(漢隷)의 고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만 한예는 한 글자에서 하나의 파책이 강조되는 점이 일반적인데 비해 이 편액의 글씨는 강조된 획은 꼭 파책만이 아니라는 점이 특이하다. 만(晩)에서는 마지막 파책과 함께 가운데 횡획이 강조되었고, 수(修)에서도 우측 파책과 함께 가로획이 두텁게 강조되었고 마지막 재(齋)에서는 아예 두 번째 횡획만 강조되었다. 고예(古隷)와 한예(漢隷)가 혼합되던 청대 예서의 영향으로 보이며 결과적으로 당시 현대적이고 세련된 글씨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명품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소개


이상정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증조는 이효제(李孝濟)이고, 조부는 이석관(李碩觀)이며, 아버지는 관가재(觀稼齋) 이태화(李泰和)이고,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는 밀암(密菴) 이재(李栽)의 딸이다. 7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웠는데 지칠 줄 모르고 글을 읽었으며 12~13세에 벌써 『사서』를 다 읽었다. 『연보』에 의하면 14세 때 외조부인 밀암 이재 밑에서 『소학』과 『맹자』를 수업하였다. 이재가 세상을 떠나자 어느 날 홀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문장은 한낱 조그마한 재주일 뿐이니, 기수(器數) 예기(禮器)와 예수(禮數) 등의 의문(儀文)의 말단이요 도(道)의 지극한 바가 아니다.”라고 하고는 『병명팔첩屛銘八帖』을 지었는데 독서(讀書), 독지(篤志), 신사(愼思), 사고(師古), 근독(謹獨), 성신(省身), 일신(日新), 역행(力行)의 여덟 가지였다. 소호리 북쪽에 있는 대석산(일명 일개산) 아래에 대석서당을 지어놓고 자제들을 교육하였는데, 이때 지은 시가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처마에는 후둑후둑 비 내리고
창문은 머나먼 바람 머금었네
오랜 나무는 온몸이 젖어들고
메마른 연못에도 물이 고였네
허공 밖의 산그늘이 드리우고
연꽃 향기 은은하게 풍겨오네
벼슬길에서 두 다리가 지쳐서
이 즐거움 그대들과 함께하리

簷瀉泠泠雨
窓含遠遠風
全身老樹濕
一水小塘空
山影來虛外
荷香得暗中
名途兩脚倦
此樂擬君同

이상정은 평소 벼슬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1751년(영조 27)에 예조낭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53년(영조 29)에 연일현감에 제수되었는데 1년이 못 되어서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그런데 1755년(영조 31)에 옥사에 연좌되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1758년(영조 34)에는 상이 특별히 명하여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으며 1762년(영조 38)에는 다시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 이상정은 조령(鳥嶺) 밑에 이르러서 병을 이유로 정장(呈狀)하고는, “갈매기는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고, 일만 리 물결 위를 자유로이 노니누나. [白鷗不關人間事 萬里波長自在遊].”라는 시를 남겼다. 그 뒤 1771년(영조 47)에 강령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1777년(정조 1)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80년(정조 4)에는 병조의 낭관에 제수되었다. 이때 상이 대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등용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대신들이 합사(合辭)하여 대산을 천거하였으므로 대산을 통정대부의 품계로 승진시켜서 병조참지에 제수하였다. 대산이 상소하여 이를 사양하자 다시 예조참의로 옮기었으며, 이듬해인 1781년(정조 5)에는 형조참의에 전보되었다. 정조는 기필코 대산을 불러들이고자 하여 대신(大臣)의 논계(論啓)를 따라서 대산을 무겁게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충주에 이르러서 글을 올리고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다시 풍기까지 가서 병을 이유로 사퇴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의 덕에 대해서 진달하는 아홉 가지 소를 올렸는데, 뜻을 세우고[立志], 이치를 밝히고[明理], 공경을 생활화하고[居敬], 하늘의 도리를 체득하고[體天], 간언을 받아들이고[納諫], 학문을 일으키고[興學], 사람을 잘 쓰고[用人], 백성을 사랑하고[愛民], 검박을 숭상하는 것[尙儉] 등이었다.

1781년 10월 병이 들어서 그가 자리에 누웠을 때 대산에게 글을 배우러 온 선비들로 인해 문 밖에는 항상 신발이 가득하였으며, 대산은 여전히 이들에 대한 응대를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고종(考終)시의 상황은 김종섭(金宗燮)과 류범휴(柳範休)가 기록한 『고종일기考終日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병이 심해지자 대산의 아우 소산 이광정이 울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자 대산이 말하기를 “분수에 따라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리고 후학들의 향상에 노력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서 웃옷을 입히고 띠를 두르게 한 다음 말하기를 “평소에 강의하여 논의한 것들을 부디 착실히 공부하여 연마하기 바란다.”라고 하였으며 이어 “이와 같은 일들은 다만 일상적인 것들일 뿐이다. 그러나 본래 이와 같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 오묘한 이치가 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중드는 이에게 명하여 요와 이불을 깨끗이 새로 깔게 하고는 붙들어 일으켜서 자리를 바꾸어 눕히게 하였다. 그런 뒤 이튿날 조용히 숨을 거두니 12월 9일(정축)이었다. 이듬해 3월 을축일에 안동부의 북쪽에 있는 학가산의 사향 언덕에 안장하였다.

이상정은 18세기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 밀암(密菴) 이재(李栽)로 이어지는 퇴계학을 집대성하여 소퇴계(小退溪)로 불리었다. 이상정에 의해 집대성된 퇴계학은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는 계통과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있어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으로 이어졌다.

대산종택이 위치한 소호리는 망호리로도 불리는데, 마을 앞에 커다란 호수가 있고 고려 때 시랑 벼슬을 지낸 소씨(蘇氏) 성을 가진 이가 이곳에 살 때 마을 앞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는 한산이씨(韓山李氏)와 대구서씨(大邱徐氏)의 동성마을로, 북쪽으로 향한 음지마을과 남쪽으로 향한 양지마을이 있다. 여기에는 이상정의 5대조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가 살았던 수은종택이 있다. 이홍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0대손으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외손자다. 병자호란 때는 안동의 의병장이 되어 남한산성으로 출발하였으나 이미 강화한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이 종택 사랑채에 관가당(觀稼堂)이란 당호가 걸려 있는데, 수은의 증손자이자 대산의 아버지 이태화(李泰和)의 호이다. 종택 뒤에는 수은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수옥정은 1953년 지은 것으로, 이홍조가 당시 후학들을 강학하던 곳에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대산종택은 넓은 마당을 앞에 두고 뒤쪽에 안채를 배치하였으며, 안채 우측에 방형의 담을 둘러 사당 공간을 따로 마련하여 종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실의 구성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을 들이고 그 앞에 부엌을 두었다. 대청 우측에는 세로 3칸에 3개의 방이 연이어 있는데 위쪽의 방을 태실(胎室)이라 부르며 중사랑방으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2칸은 제례시에 사용하는 방(빈소)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대산집』
  • 『안동오면 뵈줄게』
  • 『안동의 문화유산』
  • 『안동의 지명유래』
  • 『안동의 명현당호2』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